오늘 여기에 글을 적으며 사색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안다"라는 행위입니다. 참 애매한게, 우리가 흔히 빛을 파동이냐 입자이냐로 혼동하는 것처럼, 안다 라는 것도 정적이냐 동적이냐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죠.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 앎의 대상은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와 영향을 받으며 시시각각 변화합니다. 저같은 경우 몸에 좋은 과일을 찾다가 사과가 아침에 섭취하면 몸에 참 좋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먹던 사과인데 말이죠.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 부터 사과를 알아왔습니다. 바로 백설공주의 독사과였죠. 저는 어렸을 때 그 동화에서 얻게된 사과의 부정적인 측면을 나이가 들어서야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과 라는 물질은 머릿속에 그대로 있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변화를 느낄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이라는 생물체의 메카니즘 인것 같습니다.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았다." 결국 이건 우리가 어떠한 감각에 더 의존 하느냐에 달린 문제인것 같습니다. 특정한 사물을 눈이라는 제한적이고 단방향적인 면만을 보느냐, 아니면 오감을 통합해 그것의 전체를 느끼느냐 라는 문제라는 것이죠. 사과를 눈으로 보면 사과는 영원한 사과입니다. 단면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사과 라는 물질 밖에 모르는겁니다. 반면 그것이 다른 여러 상황에서 어떠한 존재로 운용 되는지를(몸에 좋은 사과, 그리고 독사과) 파악하려면 눈이 아닌 몸으로 습득해야 합니다. 사과를 아침에 먹어보지 못하는 한, 그리고 사과에 독을 묻혀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하는 한, 사과라는 존재가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과가 쪼개어 진다면 어떨까요? 매일 사과를 쪼개 먹는, 아니 모든 과일을 자르고 쪼개서 먹는 인류에겐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과 라는 물질적 음식을 언어 라는 정신적 음식으로 변환하는 순간 재밋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사과를 포함한 수많은 과일들이 매일 섭취의 대상이 되어 인체에 필요한 수분과 탄수화물을 섭취해주는 것처럼, 언어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념"을 담고 그것이 뇌로 섭취 당합니다. 개개의 단어, 숙어, 문단, 문장, 또는 이 모든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념, 사념등은, 위에서 말한 "사과 이야기"와 똑같이 적용됩니다. 물질적 사과가 그랬던 것처럼, 작게 봐서는 개개의 단어들 크게 봐서는 인간을 운용하는 이념들 또한 단면만 보느냐 아니면 체험하고 체득하느냐에 따라서 그 존재를 인식해내는 결과물이 달라집니다.
흥미로운건, 모든 언어가 다 똑같진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한자와 알파벳의 경우 그렇습니다. 한자의 경우, 체득해야만 인지 할 수 있는 반면, 알파벳의 경우 시각적 파악을 통한뒤에서야 그러한 체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즉, 한자는 그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서, 개개의 단어 하나가 매우 명확한 감각의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담고 있는 한자라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경험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죠. 心 이란 피끓는 심장이라는 물질을 정세도를 낮추어서 단순화해낸 것이고, 佯 의 경우 "양떼(羊)"라는 거대함을 인간(人)에게 빗대어 체험화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알파벳은 전혀 그런게 없습니다. 그저 제한된 숫자의 소리기호내에서의 선택을 통해 표기 해내는 것으로, 오로지 시각적 도구에 의존하므로 감각이 꿰차고 들어올 공간은 매우 적어보입니다.
오래전에 학교 친구들이 제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영어 잘하려면 어찌해야햐나?" 그래서 저는 답했습니다. "문법을 알아라". 그러자 대다수의 친구들은 회의적인 눈길을 주며, "외우는게 다는 아니다"라며 변명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을 보면서 느낀 답답함을, 지금 우리나라 라는 사회전체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뭔가를 안다 라고 말 할때, 그리고 그 앎에 통달한 천재를 이야기 할때, "나도 모르게"라는 명제를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모든걸 알았다더라~ 또는 한번보고 모든걸 통달했다더라~ 라는식으로 말이죠. 즉, 천재들은 알아야 할 뭔가를 접했을때 매우 짧은시간 만에 그러니까 사실상 거의 자동적으로 그것을 파악하고 머리속에 저장했다라는 공식으로 한국인들은 그들을 계산합니다. 그리고 그 공식에 맞지 않는 자신들은 천재가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리죠.
이는 영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영어. 하지만 그들은 노예 근성으로 노력하면 모든게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즉, 계속 보다보면 어느순간 그것이 알게모르게 알게되어, "순간적인 반응"을 얻게되리라 믿는겁니다. 그리고 왕도는 없다 라고 외치며. 시간낭비를 계속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느정도 습득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자, 저는 속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수의 한국인들도 저처럼 속았고 또 속고 있으며 앞으르도 속을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사과가 있습니다. "그 맛은 달면서 조금은 시큼하며 씹히는 기분은 아삭아삭하고 씹을 수록 입에서 물이 한가득 차는 기분입니다. " 앞에서 적은 사과의 맛에 대한 묘사가 책에 나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사과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니 먹어본 사람에게도 이 문장이 시험에 나온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마 제게 문법을 외우는게 다는 아니다 라고 말한 친구들은 이러한 문장을 보면 외우려 들려할겁니다. 그들은 잘못된 천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저 문장을 시험에서 봤을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겁니다.
이 같은 "외움의 오류"는 대다수 한국인들이 가진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예입니다. 계(System)를 보지 못하고 체득하는데 인생을 바치죠. 이성 보다는 감각적인 언어에 충실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 글을 쓰고, 생각을 하며, 그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경쟁합니다. 마치 올쓰레기통이나 저글루스처럼. 예로, 이명박을 생각해봅시다. 이명박의 말에는 주어가 "업"습니다. 이건 이명박만 그런게 아니라 대다수의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가 그렇습니다. 웬만한 품사가 빠지더라도 다 알아듣는게 보통입니다. 그들에겐 말을 적게 할 수록 편리한 소통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들은 항상 타인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주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걸 놓치는 순간 타인이 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져 버리기 떄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타인을 향해서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수단의 불분명함이 만들어낸 편리, 하지만 그건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가고 있는 셈이죠. 이같은 "한국인 작동원리"를 이용해 조중동은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고, 또한 저글루스 쓰레기들이 생명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타인을 위해 삶을 살면서 체득한 진리는, 다름아닌 "순간적 반응"이고, 속도전입니다. 앎에 과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결과만 존재하는 것이죠. 이는 위에서 언급한 한자의 원리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인 노예들은 이같은 "외움의 오류"에 빠진것입니다. 마치 한자를 외우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것을 암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것은, 시스템 내에서 운용됨만을 우선 하기 때문에, 그들에겐 보이는 원리보다는 보이지 않는 운용에만 신경을 쓰는겁니다.
우선은, 이 같은 "거짓"을 깨부수고 앎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부터 "잊어야" 해야합니다. 즉, 천재의 작동원리 아니 생각이라는 것의 작동원리는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모든것이 알아서 처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평범하게 그리고 매일 하는 사고 과정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레고는 비싸서 못사고 시장에 파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든 저렴한 블럭쌓기를 사다 주셨고, 그걸로 이것 저것 만들어 내는 경험을 했습니다. 항상 결과물은 인간형 로봇 또는 요새 아니면 비행기, 집 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손에 꼽힐정도로 몇가지 되지 않았죠. 조각조각 모아서 하나의 완성체를 만들어내면서 느낀건, 나도 모르게 그 모든것들이 가능 했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8살도 채 안되던 제겐 그건 정말 놀라운 경험으로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정신을 집중하면 원하는 집이나 로봇의 형체가 완성되는것, 이것은 흔히 일본 애니메이션 에서 마법의 주문을 정신을 모아서 읽으면 그것이 실체로 형상화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또다른 재밋는 경험을 하게됩니다. 조립 로봇 이었죠. 블럭쌓기로 자유롭게 만드는게 아니라 정밀한 조립도를 통해서 조각조각을 맞춰서 완성해야만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려진 것과 같은 조각을 찾아서 그것들을 이어붙이는 행위였죠. 그리고 또하나. 종이접기. 정형화된 정사각형 종이를 설명서에 적힌대로 따라서 접다보면 형상이 만들어지는것.
저는 영어 문법을, 그 친구들 말대로, 결코 외운적이 없습니다. 성문 종합만 보던 제겐, 그 책은 문법이란 하나의 조립 설명서였습니다. 마치 블럭쌓기, 조립로봇, 그리고 종이접기의 그것처럼 말이죠. 제겐 성문종합에 적혀있는 수많은 설명들이 하나의 블럭조각들처럼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각들은 이미 알고 있던 한국어에서 이어져 온것들이구요. 제겐 영어는 한국어라는 조각과 별 차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모양이 조금 다르고 조립하는 방법이 약간 차이날뿐.
이건 단지 영어 뿐만이 아니라, 제가 접하는 세상의 그 모든것들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입니다. 저는 세상을 외우려 들지 않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충분히 다양한 방법으로 많이 또는 적게 느끼는지를 이해하는걸 우선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시 분리해내고 난뒤에 내가 원하는대로 재배열 해보면서 사색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리고 그 사색의 방법에 있어서는, 고전을 통해서 얻은 세상의 운영방법, 그러니까 설명서를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으로 그 이론들에게 운영 당한다는건 질색입니다. 운영당하면 그때 부터 감각이 무뎌짐이 선명하게 느껴지니까요.
이같은 "사색의 즐거움"으로 외움의 오류 그러니까 다른말로 하자면 "운용되는 노예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조금은 더 창조적으로 조립하는 자유를 느끼고 있고, 그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처럼.
결론은 이렇습니다.
"암기는 無이다. 오로지 인식만이 有이다. 물질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나 라는 자아에 있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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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Test, Exam)때문이죠.
평범한 사람으로선 인지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일단은 외워서 적어 제출해도 점수는 나오니까요. 고1 수학 시험 시간에 어떤 친구는 갑자기 (아마 스스로도 몰랐을 겁니다만)"얼싸안꼬"를 외치더군요.(all sin, tan, cos - 비슷한 암기법으로 앗싸티코도 있었습니다만) 반에서 그래도 3등 안에 드는 수재였는데, 그 친구를 바라보며, 음... 성적이 좋다고 해서 오든 걸 이해(인지)하진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긴데요, 저는 영어를 잘 못 합니다만,
영어, 한자. 근본적으로 언어 구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영어를 공부할 때와 한자를 공부할 때 마음가짐 자체(각자 그 쪽 문화를 이해하는)를 달리 하면 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그 나라 언어를 사용하면서 문화 또는 문명을 발전시켜왔을테니 말이죠. 그 나라 말을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 제가 그걸 못해서 영어를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좀 어렵긴 하지만, 잘 정리해 주신 덕분에 이번엔 좀 잘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