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이라는 사람이 서태지에 대한 적어놓은 글을 보고, 저런 사람도 기자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사람이 횡설 수설 한 것을 모두 모아서 반박해볼까 합니다.
과연 서태지는 기획사가 만들어내지 않은 마지막 세대였나?
저는 이말을 보고 적지않게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허지웅이라는 작자가 기자라는 호칭이 과연 적당한지 까지도 의심이 갔습니다. 왜냐면 역설적으로 볼때 서태지는 기획사가 만들어낸 세대, 즉 10대 가수들의 시초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양면적인 경우이기 때문이죠.
서태지 이전의 세대는, 지금도 그렇듯이 언더와 메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당시의 언더는 다수의 락밴드들이 차지하고 있었죠. 민주화 시기의 포크송과 그 뒤를 잊는 듯한 록밴드들은 8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비주류를 이루고 있던 가장 중요한 가수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허지웅의 말대로 작가적인 가수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메인스트림으로 분류되는 트롯트, 발라드 가수들은 전혀 작가적인 가수들이 아니었죠. 이들은 미국의 예로 들자면 비틀즈 이전의 가수들, 즉 스윙재즈나 발라드 가수들과 비슷합니다. 즉, 기획사들이 만들어낸 가사와 노래로 노래를 부르는, 자본에 종속된 가수들이죠.
미국에서 록의 정신 이라고 할때, 그 의미는 바로 "반항, 도전, 자유"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물론 그 말들은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국 음악 역사를 비틀즈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것은, 비틀즈의 노래가 단순히 좋아서가 아니라, 그자체에서 반항의 정신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시대상황이 매우 국가주의적인 전쟁시기이어서 사회적인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음악적인 분야에서만 정의를 내린다면, "노래를 만들어주는 사람, 즉 돈벌이용 음악 회사"들의 단순하고 진부한 가사와 멜로디 패턴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음악을 갈구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좀더 창조적인 음악을 말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성세대의 음악과 다른 좀더 자신들, 즉 십대와 이십대들의 이야기와 감정을 담을 만한 세로운 느낌의 음악을 원했습니다.
즉, 자본에 함몰되어서 전체주의적인 양상을 띄던 "노래 만드는 집단들의 노래" 에서 좀더 개인화되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수 있는 "개인화된 노래"가 나올수 있는 계기가 된것이 비틀즈 였습니다. 즉 노래를 부르는 "싱어"와 노래를 쓰는 "라이터"가 합쳐지면서, 개개인의 이야기가 바로 노래가 되는 시대가 열린것이죠. 그리고 젊은 미국인들은 진정으로 원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태지와 비틀즈는 많이 다른점이 많습니다. 음악의 장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하지만 위에서 말한 양상은 서태지와 한국의 문화계에서도 유사한점을 찾을수 있습니다. 서태지 이전에도 자유정신의 록 음악이 있었고, 포크 음악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싱어송 라이터들도 많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를 갈구하는 한국의 십대들의 음악이 되진 못했습니다. 저도 이점에 대해서 뭐라 왈가왈부 하긴 싫지만,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서태지가 엘범을 내고 나서 십대들의 음악이 점점 주류화 되어갔습니다. 서태지의 등장으로 시대가 변하기 시작한것이죠. 음악의 주인공, 즉 음악 산업의 주요 소비자가 30~40대의 트로트에서 10~20대의 젊은층의 댄스 음악, 또는 힙합등으로 다양화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서태지가 정말 우리나라 음반 산업을 송두리채 바꾼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다양한 새로운 기업들과 음악 생산자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서태지 이전에 주름잡던 "트로트 음악 만드는 단체" 에서 이젠 "10~20대의 음악을 만드는 회사" 로 바뀐것이니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적 음악자, 즉 일종의 싱어송 라이터는 우리나라의 메인 스트림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수 있습니다. 몇몇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이 대중음악의 전면에 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결국 서태지의 전후의 한국 음악 산업은, 주요 소비자가 바뀌긴 했지만, 기업적인 음악 제조 공장의 형태는, 메인스트림의 경우를 볼때 전이나 후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허지웅이 "기획사가 만들어내지 않은 마지막 세대" 라는 말을 한것은, 메인스트림의 전면에 부상하진 못했지만, 한국의 음악사를 빛내고 있는 현재의 수많은 스타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볼수 있습니다. 서태지 외에는 자유로운 음악가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편파적이고 왜곡된 시각은, 아마도 허지웅이라는 작자가 메인스트림 쪽의 음악에만 집착하는 일종의 잘못된 편집증을 가져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면 서태지가 메인스트림에서의 마지막 싱어송라이터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진 몰라도, 서태지 만큼이나 좋은 음악과 노래, 밴드들이 존재하고 있는것은 사실이고, 그들이 바로 서태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죠..
오만방자한 허지웅이라는 사람이 기자라는 이름으로 내뱉어대는 어처구니 없는 그 발상에 그저 기가막힐 뿐입니다.
서태지의 3집은 필연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서태지의 이야기였다
허지웅의 음악에 대한 이해력부족은 서태지의 3집에 대한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것처럼, 서태지는 싱어송라이터로는 최초로 메인 스트림에서 전면으로 부상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단지 음악을 잘해서 일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관리를 잘해서일수도 있고, 또는 운에 따른것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건 바로 그가 주류의 한가운데 올라섰다는것이죠.
허나 서태지의 음악적시작은 바로 자유분방함을 원하는 서태지 자신의 음악과, 그걸 원했던 십대, 이십대들의 갈망과 잘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즉, 애초에 서태지가 음악을 한것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해내는 자유로운 음악에 대한 갈구로 시작된것이고, 그것이 그 시대에 잘 맞아 떨어진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서태지가 3집에서 팬들에게 그저 "새로운"음악이 아니라 "자유로운, 또는 반항적인"음악을 한것또한 팬들을 위한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자신이 원했던 자유와 반항이라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왜냐면 과거나 지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악공장들, 즉 기업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할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존재들이거든요. 그들이 음악을 하는것은 돈 이라는 자본적인 목적을 하는것이기 때문에, 정치라는 위험한 요소를 건드리게 되면 바로 그들의 목적에 반대되는 결과와 부닥치게 됩니다. 즉, 정치적인 집단의 압박이 들어오면 "집단적이고 합동적인 음악 생산"에 차질을 빚게될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리고 정치적인 위험과 부담 때문에 "그들의 협력"에도 금이가게될겁니다
하지만, 합동적인 음악 양산체제가 아닌,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 음악을 만드는 1인 생산시대의 서태지는 그 걱정에서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서태지는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러한 음악을 실행으로 옮길 의지와 용기를 가졌던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단지 소비자들을 위한 공장에서 찍어낸 음악이 아니라, 서태지 스스로의 결정과 책임에 의한것이었으므로, 팬들을 위한 수동적인 음악이 아닙니다. 서태지3집이 매우 사회적인 이슈를 건드린것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서태지 자신이 능동적으로 펴낸 자신만의 이야기이므로 역설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 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즉, 서태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존재적인 "자유"를 통해서, 자신이 느낀바를 노래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서태지, 그는 허지웅 당신의 존재의 이유이다
몇주전에 뜬금없이 미국의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마크 트웨인이라는 미국의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타임지는 시사IN 처럼 매주 깊은 주제로 사회를 관통해보는 유명한 미국의 주간지 입니다. 그리고 트웨인은 우리가 잘 아는 허클베리핀의 모험, 톰소여의 모험 등으로 잘 알려진 소설 작가입니다. 왜 갑자기 타임지에서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올린걸까요?
마크 트웨인은 당시 미국에서 명성을 날리던 작가중의 한명이었습니다. 1900년도 초반엔 지금 처럼 TV도 없었기에 지금의 연예인같은 우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의 유명한 인사는 연예인이 아닌, 작가, 과학자, 소설가 들이었죠. 우리가 잘아는 아인슈타인도 이당시에 매우 유명한 일종의 "우상"같은 존재였습니다. 마크 트웨인도 그런 축의 한명이었죠.
마크 트웨인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진지하면서도 웃긴 그런사람이었거든요. 그사람의 글에는 매우 해학적이고 유머스러우면서도,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뼈있는 뭔가를 담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한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냈고, 웃기면서도 뭔가 진지한 그의 글은 더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사회문제에 발을 들여놓을수 있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마크트웨인의 사회적인 기여도는 지금도 널리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미국 대선을 지켜보다 보면,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양상을 띕니다. 우선, 연예인들이 정치인에 대한 지지선언을 한다거나, 또는 개그맨들이 정치인에 대한 유머스러운, 하지만 비판적인 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들을 국민들에게 던집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것이 한낱 TV에 불과하다고 여기면서도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죠. 특히나 미국의 코믹 토크쇼들은 이러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웃기면서도 사회에 참여의 발을 쉽게 넣을수 있는 그런것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사회에 서태지가 없었다면, 과연 그당시 십대들이 사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수 있는 마음을 가질수 있었는지 조차도 의심이 갑니다.
과거 7~80년대의 십대, 이십대들은 먹고사는것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일부 대학생들은 서양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가진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죠. 그들이 지금의 386 세대의 정치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그때는 7~80년대보단 살기가 좋아졌던 때입니다. 그리고 점점 젊은이들의 정치와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져가고 있었죠. 그리고 서태지가 3집엘범을 들고 나왔었습니다. 사회에 대해 노래를 부를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매우특이하게만 느껴지지만, 좀더 깊게 보면 서태지는 단지 사회에 대한 노래를 부른것이아니라, 오히려 "사회" 라는것을 메인스트림의 주인공이 "음악"이라는 것과 접목시킨 최초의 사람이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마크 트웨인이 어린 아이들의 반항을 통해서 세상을 통렬하게 풍자하면서, 세상의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이야기 또한 웃음을 통해서 참여할수 있다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그것이 지금의 미국 대선 문화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서태지가, 마크 트웨인이 문화라는 코드를 통해서 세상의 이야기를 할수 있다는것 보여준것처럼, 그 당시엔 점점 먼 과거로 잊혀져 가던 민주화 시대이후, 그리고 그 과거를 모르던 새로운 세대들에게 "다시한번" 그리고 "매우 성공적으로" 노래를 통한 사회 참여가 가능하다는것을 보여주고 깨닫게 해준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대들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덕택에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린게 아닙니까?
서태지는 여기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다.
사실 밥딜런은 “나는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이건 한국에서 번역한 밥딜런에 관한 영화 제목일뿐이죠.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암낫 데어(I`m not there) 입니다. 그리고 암낫 데어, 즉 "나는 거기에 없다" 라는 제목은 밥딜런의 노래에서 따온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영화는 밥딜런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걸 비유적으로 빗댄 영화일 뿐입니다.
밥딜런은 잘 알려진대로 매우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편에 속했고, 포크록 가수 였습니다. 위의 영화에서도 특이하지만 잘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거기"는 바로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는 사회 참여형의 밥딜런을 말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사회참여, 반항아의 밥딜런이 아니라, 밥딜런이 한편으론 좋아했으면서도 거부했던 그 모든것들을 말한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노래엔 "그녀"와 "그" 그리고 "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곳을 "거기"라고 부릅니다.
나는 그녀가 우는것과 힘든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나는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다가갈수 있었을때, 나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속박당하지 않을거라고 외치며, 그녀는 외로운 하지만 혼자 살아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마치 내가 없을때만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 나는 애를 태웁니다. 그리고 나는 낙담한 나머지, 그녀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을거라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결국 그녀를 놓쳐버립니다. 그녀가 떠나버릴거라고 걱정만 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울고 있습니다. 그녀를 잃었다는 마음에 슬퍼하며 낙담합니다.
이렇게 한편의 시같은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가 말하는 여기와 거기를 잘 알수 있습니다. 거기는 바로 그녀가 있는곳이고, 여기는 바로 내가 지금 있는곳을 말합니다. 만약 그녀가 바로 밥딜런이 말하는 사회적인 참여라면, 밥딜런 스스로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애정과 거리감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볼수 있습니다. 밥딜런은 "자유를 갈망하는 반항"에 대한 사랑을 타고 났지만, 내가 그런 사회에 가까이가면 마치 그것이 없는것처럼, 또는 그를 원하지 않는것같아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주저하다가 결국 그것을 놓쳐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죠.
그렇다고 밥딜런이 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린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구에서 그녀를 속이지 않을거라고, 그리고 그저 내가 거기에 없을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그대로 서태지에게도 적용될수 있습니다. 사실 서태지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은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담아내고자 하는 음악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태지가 그저 돈에 대한 미련과 현실에 안주해버렸다면, 한국 저작권협회에서도 탈퇴 하지않았었겠죠.
즉, 개인적이고 자립적인 음악가 라는 모습을 유지해내면서, 밥딜런이 원하던 "사회적인 자유"를 계속 이어가길 원하는게 서태지 이며, 그것은 서태지의 컴백 이후 엘범들에서도 계속 유지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실질적인 사회 참여는 아니더라도, 음악가로서의 누릴수있는 최대한의 자유라는 점에서, 서태지는 메인스트림이라고 불릴만한 한국의가수들 중에 유일하게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줄수가 있는겁니다.
만약 서태지가 다른 가수들처럼 엘범나올때마다 쇼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막장짓도 좀해가면서, 남들 호박시도 까고 돈벌이에 급급한다면 과연 그것이 밥딜런이 말한 "거기"에 가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절제된 모습으로 필요한 만큼의 광고활동과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해나가면서, 독립적인 음악가로써의 이름을 지켜나가는 것이야 말로 서태지가 거기에 갈수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왜냐면, 가까운 거리에 모든것이 노출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예술가나 아티스트가 아닌 하나의 동네 친구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동네친구들은 돈을 벌기위해 방송국에서 앵벌이를 해야하는 거지신세로 몰락하게 됩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뭔가를 파는것이 음악가인데, 너무많이 노출되어버린다면 자신이 만들어낸 뭔가를 파는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팔아야 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매우 가깝고 촉감적인 전기적시대에는 음악 뿐만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이 돈이 될수 있는 시대이므로, 굳이 어려운 음악보다는 자신 스스로를 파는게 더욱더 경제적인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잘생기고 춤잘추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수가 되는 이유일겁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에서 찍어낸 듯한 노래하는 로봇들은, 자유 보다는 돈을 택하게 되므로, 거기에 갈수없는, 항상 여기에 안주해야되는 "제한적인 존재"들이죠.
즉, 서태지가 항상 거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음악을 위한 자유를 위해서일뿐이고, 또 거기에 계속 있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서태지의 자유로운 음악을 들을수가 있는겁니다.
과연 서태지는 기획사가 만들어내지 않은 마지막 세대였나?
저는 이말을 보고 적지않게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허지웅이라는 작자가 기자라는 호칭이 과연 적당한지 까지도 의심이 갔습니다. 왜냐면 역설적으로 볼때 서태지는 기획사가 만들어낸 세대, 즉 10대 가수들의 시초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양면적인 경우이기 때문이죠.
서태지 이전의 세대는, 지금도 그렇듯이 언더와 메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당시의 언더는 다수의 락밴드들이 차지하고 있었죠. 민주화 시기의 포크송과 그 뒤를 잊는 듯한 록밴드들은 8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비주류를 이루고 있던 가장 중요한 가수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허지웅의 말대로 작가적인 가수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메인스트림으로 분류되는 트롯트, 발라드 가수들은 전혀 작가적인 가수들이 아니었죠. 이들은 미국의 예로 들자면 비틀즈 이전의 가수들, 즉 스윙재즈나 발라드 가수들과 비슷합니다. 즉, 기획사들이 만들어낸 가사와 노래로 노래를 부르는, 자본에 종속된 가수들이죠.
미국에서 록의 정신 이라고 할때, 그 의미는 바로 "반항, 도전, 자유"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물론 그 말들은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국 음악 역사를 비틀즈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것은, 비틀즈의 노래가 단순히 좋아서가 아니라, 그자체에서 반항의 정신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시대상황이 매우 국가주의적인 전쟁시기이어서 사회적인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음악적인 분야에서만 정의를 내린다면, "노래를 만들어주는 사람, 즉 돈벌이용 음악 회사"들의 단순하고 진부한 가사와 멜로디 패턴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음악을 갈구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좀더 창조적인 음악을 말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성세대의 음악과 다른 좀더 자신들, 즉 십대와 이십대들의 이야기와 감정을 담을 만한 세로운 느낌의 음악을 원했습니다.
즉, 자본에 함몰되어서 전체주의적인 양상을 띄던 "노래 만드는 집단들의 노래" 에서 좀더 개인화되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수 있는 "개인화된 노래"가 나올수 있는 계기가 된것이 비틀즈 였습니다. 즉 노래를 부르는 "싱어"와 노래를 쓰는 "라이터"가 합쳐지면서, 개개인의 이야기가 바로 노래가 되는 시대가 열린것이죠. 그리고 젊은 미국인들은 진정으로 원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태지와 비틀즈는 많이 다른점이 많습니다. 음악의 장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하지만 위에서 말한 양상은 서태지와 한국의 문화계에서도 유사한점을 찾을수 있습니다. 서태지 이전에도 자유정신의 록 음악이 있었고, 포크 음악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싱어송 라이터들도 많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를 갈구하는 한국의 십대들의 음악이 되진 못했습니다. 저도 이점에 대해서 뭐라 왈가왈부 하긴 싫지만,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서태지가 엘범을 내고 나서 십대들의 음악이 점점 주류화 되어갔습니다. 서태지의 등장으로 시대가 변하기 시작한것이죠. 음악의 주인공, 즉 음악 산업의 주요 소비자가 30~40대의 트로트에서 10~20대의 젊은층의 댄스 음악, 또는 힙합등으로 다양화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서태지가 정말 우리나라 음반 산업을 송두리채 바꾼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다양한 새로운 기업들과 음악 생산자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서태지 이전에 주름잡던 "트로트 음악 만드는 단체" 에서 이젠 "10~20대의 음악을 만드는 회사" 로 바뀐것이니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적 음악자, 즉 일종의 싱어송 라이터는 우리나라의 메인 스트림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수 있습니다. 몇몇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이 대중음악의 전면에 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결국 서태지의 전후의 한국 음악 산업은, 주요 소비자가 바뀌긴 했지만, 기업적인 음악 제조 공장의 형태는, 메인스트림의 경우를 볼때 전이나 후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허지웅이 "기획사가 만들어내지 않은 마지막 세대" 라는 말을 한것은, 메인스트림의 전면에 부상하진 못했지만, 한국의 음악사를 빛내고 있는 현재의 수많은 스타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볼수 있습니다. 서태지 외에는 자유로운 음악가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편파적이고 왜곡된 시각은, 아마도 허지웅이라는 작자가 메인스트림 쪽의 음악에만 집착하는 일종의 잘못된 편집증을 가져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면 서태지가 메인스트림에서의 마지막 싱어송라이터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진 몰라도, 서태지 만큼이나 좋은 음악과 노래, 밴드들이 존재하고 있는것은 사실이고, 그들이 바로 서태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죠..
오만방자한 허지웅이라는 사람이 기자라는 이름으로 내뱉어대는 어처구니 없는 그 발상에 그저 기가막힐 뿐입니다.
서태지의 3집은 필연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서태지의 이야기였다
허지웅의 음악에 대한 이해력부족은 서태지의 3집에 대한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것처럼, 서태지는 싱어송라이터로는 최초로 메인 스트림에서 전면으로 부상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단지 음악을 잘해서 일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관리를 잘해서일수도 있고, 또는 운에 따른것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건 바로 그가 주류의 한가운데 올라섰다는것이죠.
허나 서태지의 음악적시작은 바로 자유분방함을 원하는 서태지 자신의 음악과, 그걸 원했던 십대, 이십대들의 갈망과 잘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즉, 애초에 서태지가 음악을 한것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해내는 자유로운 음악에 대한 갈구로 시작된것이고, 그것이 그 시대에 잘 맞아 떨어진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서태지가 3집에서 팬들에게 그저 "새로운"음악이 아니라 "자유로운, 또는 반항적인"음악을 한것또한 팬들을 위한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자신이 원했던 자유와 반항이라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왜냐면 과거나 지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악공장들, 즉 기업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할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존재들이거든요. 그들이 음악을 하는것은 돈 이라는 자본적인 목적을 하는것이기 때문에, 정치라는 위험한 요소를 건드리게 되면 바로 그들의 목적에 반대되는 결과와 부닥치게 됩니다. 즉, 정치적인 집단의 압박이 들어오면 "집단적이고 합동적인 음악 생산"에 차질을 빚게될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리고 정치적인 위험과 부담 때문에 "그들의 협력"에도 금이가게될겁니다
하지만, 합동적인 음악 양산체제가 아닌,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 음악을 만드는 1인 생산시대의 서태지는 그 걱정에서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서태지는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러한 음악을 실행으로 옮길 의지와 용기를 가졌던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단지 소비자들을 위한 공장에서 찍어낸 음악이 아니라, 서태지 스스로의 결정과 책임에 의한것이었으므로, 팬들을 위한 수동적인 음악이 아닙니다. 서태지3집이 매우 사회적인 이슈를 건드린것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서태지 자신이 능동적으로 펴낸 자신만의 이야기이므로 역설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 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즉, 서태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존재적인 "자유"를 통해서, 자신이 느낀바를 노래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서태지, 그는 허지웅 당신의 존재의 이유이다
몇주전에 뜬금없이 미국의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마크 트웨인이라는 미국의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타임지는 시사IN 처럼 매주 깊은 주제로 사회를 관통해보는 유명한 미국의 주간지 입니다. 그리고 트웨인은 우리가 잘 아는 허클베리핀의 모험, 톰소여의 모험 등으로 잘 알려진 소설 작가입니다. 왜 갑자기 타임지에서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올린걸까요?
마크 트웨인은 당시 미국에서 명성을 날리던 작가중의 한명이었습니다. 1900년도 초반엔 지금 처럼 TV도 없었기에 지금의 연예인같은 우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의 유명한 인사는 연예인이 아닌, 작가, 과학자, 소설가 들이었죠. 우리가 잘아는 아인슈타인도 이당시에 매우 유명한 일종의 "우상"같은 존재였습니다. 마크 트웨인도 그런 축의 한명이었죠.
마크 트웨인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진지하면서도 웃긴 그런사람이었거든요. 그사람의 글에는 매우 해학적이고 유머스러우면서도,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뼈있는 뭔가를 담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한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냈고, 웃기면서도 뭔가 진지한 그의 글은 더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사회문제에 발을 들여놓을수 있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마크트웨인의 사회적인 기여도는 지금도 널리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미국 대선을 지켜보다 보면,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양상을 띕니다. 우선, 연예인들이 정치인에 대한 지지선언을 한다거나, 또는 개그맨들이 정치인에 대한 유머스러운, 하지만 비판적인 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들을 국민들에게 던집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것이 한낱 TV에 불과하다고 여기면서도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죠. 특히나 미국의 코믹 토크쇼들은 이러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웃기면서도 사회에 참여의 발을 쉽게 넣을수 있는 그런것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사회에 서태지가 없었다면, 과연 그당시 십대들이 사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수 있는 마음을 가질수 있었는지 조차도 의심이 갑니다.
과거 7~80년대의 십대, 이십대들은 먹고사는것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일부 대학생들은 서양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가진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죠. 그들이 지금의 386 세대의 정치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그때는 7~80년대보단 살기가 좋아졌던 때입니다. 그리고 점점 젊은이들의 정치와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져가고 있었죠. 그리고 서태지가 3집엘범을 들고 나왔었습니다. 사회에 대해 노래를 부를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매우특이하게만 느껴지지만, 좀더 깊게 보면 서태지는 단지 사회에 대한 노래를 부른것이아니라, 오히려 "사회" 라는것을 메인스트림의 주인공이 "음악"이라는 것과 접목시킨 최초의 사람이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마크 트웨인이 어린 아이들의 반항을 통해서 세상을 통렬하게 풍자하면서, 세상의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이야기 또한 웃음을 통해서 참여할수 있다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그것이 지금의 미국 대선 문화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서태지가, 마크 트웨인이 문화라는 코드를 통해서 세상의 이야기를 할수 있다는것 보여준것처럼, 그 당시엔 점점 먼 과거로 잊혀져 가던 민주화 시대이후, 그리고 그 과거를 모르던 새로운 세대들에게 "다시한번" 그리고 "매우 성공적으로" 노래를 통한 사회 참여가 가능하다는것을 보여주고 깨닫게 해준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대들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덕택에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린게 아닙니까?
서태지는 여기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다.
사실 밥딜런은 “나는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이건 한국에서 번역한 밥딜런에 관한 영화 제목일뿐이죠.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암낫 데어(I`m not there) 입니다. 그리고 암낫 데어, 즉 "나는 거기에 없다" 라는 제목은 밥딜런의 노래에서 따온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영화는 밥딜런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걸 비유적으로 빗댄 영화일 뿐입니다.
밥딜런은 잘 알려진대로 매우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편에 속했고, 포크록 가수 였습니다. 위의 영화에서도 특이하지만 잘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거기"는 바로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는 사회 참여형의 밥딜런을 말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사회참여, 반항아의 밥딜런이 아니라, 밥딜런이 한편으론 좋아했으면서도 거부했던 그 모든것들을 말한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I`m not there - by 밥딜런
Ev'ry thing's all right
And then she's all the time in my neighborhood
She cries both day and night
I know because it was there
It's a milestone but she's down on her luck
And the day makes her lonely
And it's so hard to buck, I was there
I believe that she'd stop him if she would start to care
I believe that she'd look upon this side
And t' care and I'd go by the something
When she's on my way, but I don't belong there
No I don't belong to her
I don't belong to anybody
She's my prize forsaken angel
But she don't care she cries
She's a lone-hearted mystic and she can carry on
When I'm there, she's all right
But she's not when I'm gone
Heaven knows that the answer she's don't call in no one
She's a wave, a thing, beautiful she's mine for the one
And I'm also hesitating by temptation lest it runs
Which it don't follow me
But I'm not there, I'm gone
Now I'll cry tonight, like I cried the night before
And I'll feast on her eyes
But I'll dream about the door
So long, Jesus, savior, blind faith worth to tell
It don't have consolation she's my
I was born to love her
But she knows that the kingdom waits so high above her
And I run but I race
But it's not too fast a pace
Of cource I'll not deceive her
I'm not there, I'm gone
It's all about confusion and I cry for her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노래엔 "그녀"와 "그" 그리고 "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곳을 "거기"라고 부릅니다.
나는 그녀가 우는것과 힘든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나는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다가갈수 있었을때, 나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속박당하지 않을거라고 외치며, 그녀는 외로운 하지만 혼자 살아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마치 내가 없을때만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 나는 애를 태웁니다. 그리고 나는 낙담한 나머지, 그녀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을거라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결국 그녀를 놓쳐버립니다. 그녀가 떠나버릴거라고 걱정만 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울고 있습니다. 그녀를 잃었다는 마음에 슬퍼하며 낙담합니다.
이렇게 한편의 시같은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가 말하는 여기와 거기를 잘 알수 있습니다. 거기는 바로 그녀가 있는곳이고, 여기는 바로 내가 지금 있는곳을 말합니다. 만약 그녀가 바로 밥딜런이 말하는 사회적인 참여라면, 밥딜런 스스로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애정과 거리감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볼수 있습니다. 밥딜런은 "자유를 갈망하는 반항"에 대한 사랑을 타고 났지만, 내가 그런 사회에 가까이가면 마치 그것이 없는것처럼, 또는 그를 원하지 않는것같아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주저하다가 결국 그것을 놓쳐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죠.
그렇다고 밥딜런이 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린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구에서 그녀를 속이지 않을거라고, 그리고 그저 내가 거기에 없을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그대로 서태지에게도 적용될수 있습니다. 사실 서태지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은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담아내고자 하는 음악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태지가 그저 돈에 대한 미련과 현실에 안주해버렸다면, 한국 저작권협회에서도 탈퇴 하지않았었겠죠.
즉, 개인적이고 자립적인 음악가 라는 모습을 유지해내면서, 밥딜런이 원하던 "사회적인 자유"를 계속 이어가길 원하는게 서태지 이며, 그것은 서태지의 컴백 이후 엘범들에서도 계속 유지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실질적인 사회 참여는 아니더라도, 음악가로서의 누릴수있는 최대한의 자유라는 점에서, 서태지는 메인스트림이라고 불릴만한 한국의가수들 중에 유일하게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줄수가 있는겁니다.
만약 서태지가 다른 가수들처럼 엘범나올때마다 쇼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막장짓도 좀해가면서, 남들 호박시도 까고 돈벌이에 급급한다면 과연 그것이 밥딜런이 말한 "거기"에 가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절제된 모습으로 필요한 만큼의 광고활동과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해나가면서, 독립적인 음악가로써의 이름을 지켜나가는 것이야 말로 서태지가 거기에 갈수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왜냐면, 가까운 거리에 모든것이 노출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예술가나 아티스트가 아닌 하나의 동네 친구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동네친구들은 돈을 벌기위해 방송국에서 앵벌이를 해야하는 거지신세로 몰락하게 됩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뭔가를 파는것이 음악가인데, 너무많이 노출되어버린다면 자신이 만들어낸 뭔가를 파는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팔아야 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매우 가깝고 촉감적인 전기적시대에는 음악 뿐만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이 돈이 될수 있는 시대이므로, 굳이 어려운 음악보다는 자신 스스로를 파는게 더욱더 경제적인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잘생기고 춤잘추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수가 되는 이유일겁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에서 찍어낸 듯한 노래하는 로봇들은, 자유 보다는 돈을 택하게 되므로, 거기에 갈수없는, 항상 여기에 안주해야되는 "제한적인 존재"들이죠.
즉, 서태지가 항상 거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음악을 위한 자유를 위해서일뿐이고, 또 거기에 계속 있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서태지의 자유로운 음악을 들을수가 있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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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오는군요. 서태지가 사실 립싱크를 만들어낸 인물이라서, 또 음악성보다는 대중성을 더 가져온 인물이라 별로이긴 하지만, 그 두가지빼곤 완벽한것 같습니다. 간만에 씨디를 사겠네요 (^^)
립싱크를 만들어냈다는 말은 좀 아닌것 같은데여~~;;
음악방송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라이브할 여건이 안됐다고 알고 있는데...
그 반발로 4집 필승때는 마이크도 없이
방송한걸루 알고여..
그리고 할수 있는 환경에서 라이브 했었죠~~~
글 잘 읽었습니다.
기자보다 글을 잘 쓰시는군요
요즘은 얼굴 잘생기고 춤만 잘추면 가수 하듯이,
펜대만 굴릴줄 알면 아무나 기자 하나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적기보단 허지웅이 라는 작자가 못적은것같네요
글 내용 정말 좋네요 서태지를 나름 좋아해서 이번에 프테2에서 진행하는 서태지콘서트 티켓도 신청해두었는데요 역시 개개인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면 그게 최고 아닐까요
락페스티벌이 서태지가 없으면 과연 지속이나 될런지 의문입니다.
그만큼 서태지는 우리문화에도 중요한 상징인것같네요
님 다음 블로거 기자 가입하세여!!!!
제~~~발~~~~!!!!!!!!!!!
다음 블로그 아닌 외부 블로그도 상관 없읍니다!!!!!!!
서태지란 이름을 논쟁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려는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일부 기자,평론가들때문에 분노를 느낍니다...........
객관성과 공신력을 앞세워서 자극적인 제목과 함량미달의 글들을 쓸 권리가 있읍니까??
비아냥과 비꼼을 비평이란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차졸함에 역겨움을 느낍니다...
언론의 도식적이고 편향된 시선에서 벗어나 문화에 대해서 넓은 시각으로 분석하는 글들을 대중들이 많이 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었읍니다...........
허지웅이라는 사람 글을 다 읽어봤는데
정말 더러워서 못봐주겠더군요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공감가는 글이네요.
그래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였어요.
서태지 비판글은 볼때마다 갸우뚱 거리는게 많더라구요. 뭐랄까.
그럴듯하게 쓴것 같기는 한데,
자세히 보면 자기 기준에서 끼워맞추려는 듯한 느낌.
그래서 글빨은 좋을진 몰라도 100% 공감은 안가는.....
한마디로 설들력이 떨어지더라구요.
그쵸 허지웅 이인간.. 영화 번안제목을 마치 밥딜런이 직접말한것인냥
기사로 썼다는건.. 기자의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할수있습니다
아~~ 근데 맨 위에는 허지웅이라고 하셨는데
글에는 허재웅이라고 하셨네요 ^^;;
아 이런; 적잖게 화가난 상태에서 글을 쓰다보니
이름을 잘못적었네요. 수정했습니다.
어제 허지웅 기자의 글을 보고 참 맘이 불편했었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좀더 짧게 쓸걸그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흐와 저와는 다르게 많이 논리적이시고 포스팅도 예술이시네요 ㅠ_ㅠ
제글에나마도 짧게 코멘트 부탁드려봅니다 ^ ^
제 블로그 젤 첫페이지니 함 들러주세요-
글 잘읽었습니다. 저랑 같은 생각이신것같아서 반갑네요:)
ozzyzz@gmail.com
이글 허지웅씨 멜로도 좀 보내주세여!!!!!
정작 논란을 제공한 사람이 안 보면 되겠읍니까??
글쓴 소양으로 봐선 댓글 안 볼거 같거든여......
추천하면 다음 블로거뉴스에 뜨나여??
블로거 기자 꼭 가입하세여!!!!
외부 블로그로도 가입 가능하다고 봤거든여.......
제발!! 일반인들이 이 글을 많이 좀 봤으면 좋겠네여.......
앞으로도 좋은 글 트랙백 걸어서 많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상이 태지라면 팬으로서 더 행복할거 같읍니다.........*^_____^*
아래는 허지웅 블로그주소.....
http://ozzyz.egloos.com/3840170
안그래도 허지웅이라는 인간의 싸구려 글을 보면서 이런작자는 기자를 못하게 해야
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사 IN측에다 허위사실유포한 허지웅을
기자 자격 박탈 요구를 할까 생각중입니다.
제목이 무척이나 맘에 듭니다.
그의 일관성을 일목요연하게 말해주는 듯 하군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그의 데뷔를 기다리는 1인으로써..
헤헤, 저희 독도 seal도 나왔어요:>
그냥 로긴하고 누르시면 자동으로 업뎃 됩니다:>
한번 놀러와주세요 헤헤
아휴, 아주 그냥 록의 정신이 충만하신 분이 글도 잘 쓰시고.
헌데 왜 미국 음악의 역사를 비틀즈 이전과 이후로 나누죠?
음악에 문외한이라서... 차라리 엘비스 전/후나 지미 핸드릭스
전/후가 더 맞는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역시 서태지 좋아하는 분들은 참 멋지네요. 글도 잘 쓰시고.
많은 분들에게 칭찬도 받으시고 허허.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뭐라는 인간이네 이름을 막 불러재끼는건 아니죠.
역시 서태지 님의 영향으로 록의 정신이 충만해서 그런건가요
허빠들 날파리 처럼 여기저기 웽웽거리는게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콱 쳐죽여버리고 싶네요. :)
남이사 뭐라하던 말던, 여기저기 참견질 좋하는걸 보니
허지랄을 그대로 본받으셨나봅니다.
이왕 참견할거면 맥락에 맞는 내용으로 하시지.. ㅋ